조각의 내부공간 반복, 혹은 부피의 소멸
김 진 하 ( 나무화랑 디렉터 )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이 시구절의 섬은 사람사이이 소통과 관계를 향한 마음의 공간을 의미한다. 그 섬은 단절되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사람과 사람사이 융화되지 못하는 거리나 간극일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다음 귀절이 있는 것일게다. 즉 현재형은 그 섬에 가지 못했다는 것이면 따라서 그 섬에서 많은 사람들과 얼리고 호흡하며 따뜻한 마음을 만나고 싶은 시인의 욕구가 귀결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은 이 섬이 있는지를 모른다. 아니 알면서 애써 외면해 버린다. 타인과의 관계나 사람사이의 순순한 대화보다는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성채에 들어가 그 섬을 지도에서 지우기 때문이다.
김석의 이번 작품은 이 '섬'과 현대인들의 '관계'에 대해 반성과 사유의 장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사실 현대인들의 일상은 그 자체가 매카닉한기계적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하나하나의 행동과 생각이 되풀이되어 하루를 이루고, 그 하루하루 절연된 시간들이 반복되어 한 기간을 이루고 다시 그 기간이 반복되어 또 다른 시간대의 삶을 형성한다. 거기에는 자아의
소외와, 타자와의 단절, 그리고 타자들의 눈과 기준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이 규전되는 대타성이 있다. 또한 자신의 성채에 꼭꼭 숨으면서도 타인과 동일화 되기를 원하면, 동시에 그 동일화에의 거부가 이율배반적으로 자기내부에 잠재된다. 김석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집단적인 심리를 모티프로해서 명상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반복, 혹은 부피의 소멸, 유리에칭, 1999 (전시장면)
그 공간은 무포정한 우리거울에 저부조된 두상들을 전시장의 벽면과 바닥에가득히 반복해서 둘러싸고, 관객이 그 안에서 벽면의 두상들과 거울에 반사되는 자신을 동시에 보게끔 설치되었다. 사실 이 형상들은 어떤 개성이나 특징도 없는 익명의 현대인들을 표상하는 것이며 관람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둘러싸고 있고 나를 비춰볼 수 있는 이 동일한 형상들은 알게 모르게 나와 관계되거나, 내가 속해 있는 사회를 함께 구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일거라는 생각 때문에 결코 가볍지 않은 자세를 관객에게 요구한다. 타인을 통해서 나를 보며 거기에서 한 사회의 일상성에 가리워진 '사람사이의 섬'에 대한 사유를 유도하는 것이다. 한쪽 벽으로 가까이 가면 자신의 얼굴만 크게 보이는 반면 뒤쪽벽에 비친 자신은 멀어지고, 또 자신의 뒷모습이 앞의 타인들 얼굴에 오버랩 된다. 무엇을 생각하든지 어떻게 볼 것인지는 관객의 몫이다. 작가는 인식과 소통의 무대로 섬을 제공했을 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아무런 분위기나 주제가 작업전면에 드러나지 않게 구성되었지만 결국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역설적이고 묵시적으로 드러내며 조각공간 내부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고, 거기에서 관객은 작가가 최소한으로 발언하는 의도에 능동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따라서 현대인들의 획일화되고 구조화된 일상성과 몰개성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과 반성행위를 관객에 불러 일으키는 것, 그 과정이 이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이 문화적이고 수평적인 소통행위야말로 사회 전체에 대한 개념화를 미술이 함축할수 있는 단서가 되고 가치를 얻을수 있는 조건도 된다.
이번 작업에서 김석은 주제나 내용을 배제했다. 또한 그 자신의 주관적인 표현성이난 서술적인 내용등을 소거하고 단순, 동일 반복의 기하학적이고 패턴화 된 이미지와 물성으로 촉각조차 배제한 중성적인 공간을 만든다. 관람객들이 소구하는 공간일 뿐 미리 제시되는 주제가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오히려 색다른 소통방식과 형식을 드러낸다. 미니멀조각의 실체적 사물성과 다르고, 공간을 조각적인 모티브로 활용하며 그것을 지각적으로 전이시키는 방식도 매스를 정점으로 하는 조각과는 다르다. 작품주변을 돌면서 입치를 보거나 감상하는 관찰자적 시점이 팔요한게 아니라 작품의 내부공간에서 두상들 (거울)과 거기에 비친 자신을 동시에 인식하는 체험적인 공간은 더욱 기존의 전시공간과는 다르다.
그런데 김석에게 있어서 이런 개념적인 설치방식은 설치미술의 범주보다는 조각의 확장과 실험으로 보인다. 조각을 중심에 놓고 도전하고 일탈하면서도 그 조삭의 영역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아마도 설치와 조각의 경계에서 자신의 형식에 대한 정체성을 증명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이제까지의 그의 전시들은, 비록 형상작업이지만, 조각형식의 변주와 실험성을 그 저변에 깔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흙의 물성과 손맛이 극대화 된 아카데믹한 자세를 취하면서도 인체의 해체와 파편화된 형상성의 실험을 시도한 90.93,94년의 개인전. 캐스팅 기법으로 초별한 두상들을 바닥에 설치하면서 기존의 3차원적인 공간보다는 조각을 바닥(Ground)화 하는 95년의 개인전(공평아트센타), 흙의 물성을 최대한 제거하면서 메카닉한 브론즈입방체에 두상을 뚫은 98년의 개인전(조현화랑)에서의 언어의 최소화, 명상적인 음향까지 도입하며 폐물들을 폴리코트로 집적하고 평면성을 추구한 금호미술관의 개인전, 그리고 더욱 평면화 되면서 표현을 소거하고 공간에 대한 개입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번의 유리에칭 설치작업(그리고 알루미늄 종이스티커)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란 소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도 결국은 형상조각의 형식과 스타일, 재료에 대한 실험 행위를 중요시 해온 것이다.
인간에 대한 실존적인 관념을 몸짓과 형태와 터치로 고백하던 김석이 이제 사회현상으로부터 비롯된 인간의 집단심리현상을 관찰하며 개념적인 명료성과 소통방식에 대한 관심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뜨거운 제스처로부터의 이탈은 곧 작가연륜의 반증이며 예민한 감수성과 이성으로 자기성찰의 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석의 조각내부공간의 부피(매스, 의미, 작가의 주관적인 의지의 외적인 표현)의 소멸과, 기호화된 현상과 형상의 반복적인 제시는 소통에 대한 투명한 리얼리티를 찿는 태도로 여겨진다. 그 태도가 어떤 결과를 얻을지는 이 작업을 본 관객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인간에 대한 김석의 지속적인 주제의식이 상징이나 은유조차 거세하며 조각의 형식실험으로 확산되는 것은 그 성패와 상관없이 분명 격려할 일이다.
그리고 또 다르게 변모할 할으로의 그의 작업과정을 기대하며 좀 더 오감을 열어 놓고서 그의 오는을 지켜보기로 하자. 그것이 이 작가에 대한 예의이자 그와 우리사에에 놓여 있는 섬에 가는 것이다.
1999. 10